분노장애 사회_우리의 역할

어제 그제 젊은 남성 3명의 분노와 무례함을 보았습니다. 젊은 남성들을 ‘angry group’으로 일반화하고 비난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페미니즘도 젠더갈등도 없습니다. 그저 그들의 분노는 양극화된 사회가 만든 점화 현상이라 봅니다. 아무래도 남성성에서 분노의 강도가 더 세게 드러나는 것이겠죠.

1. 고객에게 화를 내는 남성 A

20대 남자 아르바이트생은 배달 앱으로 접수되는 주문 알람을 향해 자주 분노를 표출합니다. 왜 이렇게 몰려서 주문이 들어오냐, 마감 가까운 시간에 주문하면 어떡하냐면서요. 또 작은 배달 실수에도 평점 테러와 필요 이상의 분노를 하는 고객들도 대부분도 젊은 남성입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 그 갑질 고객들의 표적이 되는 대상은 자주 분노하는 알바생이고요.

2. 어르신에게 욕설을 퍼붓는 남성 B

어제 모처럼 아침 8시 출근시간 버스를 이용했는데 엄청 붐비더라고요. 앞문은 아예 열리지 못할 만큼 사람들로 빽빽해서 뒷문으로 승객을 태울 수밖에 없을 만큼 버스는 포화상태가 되었습니다. 비도 오고 유난히 막히는 지하차도 진입 구간에서 두 남성의 싸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서로 밀지 마라 하면서 시비가 붙은 상황이었죠. 처음에는 티격태격하더니 점점 욕설이 오가며 심각해졌습니다. 앞문에 끼여서 소리만 듣고 있는데 고래고래 화를 내고 욕설까지 뱉는 이의 목소리가 너무 젊었고, 방어를 하는 목소리는 연세가 꽤 느껴졌습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언성이 오가는 쪽을 보니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청년과 반백 어르신이 싸우는 것이었어요. 한참을 욕설이 오가다 청년의 마지막 멘트에 어르신은 그나마 받아치던 대꾸도 중지하며 싸움이 끝났습니다. “너 한마디만 더해! 아예 죽여버릴 거니까.” 정말 경악스러웠습니다.

3. 사과를 하지 않는 무례한 남성 C

집에 오는 길에 갑자기 바람이 세차게 불면서 우산이 뒤집혔고, 덩치가 매우 큰 한 청년이 우산으로 시야를 가린 채로 제 쪽으로 돌진해 왔습니다. 순간 몸을 피하면서 균형을 잃고 길에 넘어져 데굴데굴 굴러버렸고, 우산은 바람에 날아가 버렸습니다. 청년 쪽을 바라보니 제가 넘어진 것을 알아차린 듯 잠시 주춤하면서 쳐다보는듯싶더니 그냥 가버렸습니다. 대신 앞서가시던 어르신이 바람에 날아가고 있는 우산을 집어주시며 저를 일으켜주셨습니다. 물론 저를 직접적으로 밀어버린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원인을 제공한 그 청년은 괜찮냐며 손을 내밀어 줄 여유가 없었나 봅니다. 아니면 본인과는 무관한 일이라 생각했을 수도요.​​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 배달 주문이 들어오면 짜증과 분노를 표출하면서, 다른 알바생들의 사기도 떨어뜨리는 그 친구에게 아무 피드백도 할 수 없습니다. 알바구하기가 어려운 요즘 알바생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면 안 되니까요.

​>> 어르신에게 욕설을 퍼붓는 젊은 청년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어 목구멍까지 말이 올라왔지만, 눈에는 살기가 느껴지고 공포영화 장면처럼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느껴지는 그 청년을 자극했다간 분노의 대상이 저로 옮겨질 것 같아 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버스 안의 그 누구도 말리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그 어르신에게 다가가서 위로의 말이라도 건넬 걸 그랬습니다. 자식 또래 청년에게 모욕을 당한 그 어르신의 마음에 깊은 상처로 남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빗속에서 넘어진 저를 보았으나 이내 등을 돌리고 돌아서는 그 청년을 향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냥 제가 훌훌 털고 일어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무례한 그 청년과 엮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 그리고 역을 오르는 계단에서 한 청년이 갑자기 주저앉고 난간을 잡고 있었습니다. 눈은 초점이 흐려진 상태에서 몸을 떨고 있었습니다. 청년에게 다가가서 “괜찮아요? 119 불러드릴까요?”라고 물었는데 청년이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사실 그 청년이 다시 일어서서 가는 것까지 확인했어야 했지만, 저도 9시까지 교육에 참석해야 해서 난간을 잡고 떨고 있는 청년을 뒤로한 채 와버렸습니다. 사실은 무서웠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공황장애 증상이었던 것 같은데 많이 미안하고 마음이 짠합니다.

​그렇게 저는 개인의 안위가 우선인 나약한 방관자입니다. ​​

나약한 방관자의 ‘분노에 대한 고찰’

​생존과 안위를 위협받는 상황에서 분노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떤 편향된 생각에 의해 일어나는 분노는 반드시 그 원인과 해결책을 찾아야겠습니다. 개인과 우리 사회를 위해서요. 분노를 일으키게 하는 편향된 생각의 출처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것”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그 욕구불만에서 시작된 분노는 그럴싸한 사상과 이념으로 합리화되는 과정을 거쳐 표현됩니다. 날것의 분노를 그대로 드러내면 아주 불리한 패가 되니까요.

​세상 어떤 것도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자신과는 달리 금수저로 태어나 풍족함을 누리는 이들을 보면서, 같은 선상에서 출발해도 패자가 될 수밖에 없는 토너먼트 사회시스템에서, 가진 자들이 누적 이득을 얻는 경제 원리에서, 랜덤으로 얻어걸리는 ‘운’조차 갖지 못하는 이들은 이미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기득권, 기성세대를 보며 무력함을 느낍니다. 그 무력함에서 표출되는 분노는 참 무섭습니다. 그 분노는 결국에 사회적 약자에게 향하게 되니까요.​​

 

 

분노하는 개인,
분노를 일으키는 사회시스템.
무엇부터 변화해야 할까요?

​친구에게 제가 겪은 일들을 이야기했습니다. 분노하는 이들을 위해 작은 실천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답을 얻고 싶었죠. 한창 도전하며 역량을 발휘하며 존재감을 드러내야 하는 시기에 양극화된 사회의 불균형과 저성장의 불확실한 미래에 불안해하며 자발적 고립을 선택한 청년들의 깊은 절망을 이해하고 공감합니다. 그리고 그 절망과 외로움이 자신을 해하고, 다른 약자를 해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그들의 인생에 깊이 개입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저보다 좀 더 시스템 2(생각의 숙고 체계)가 발달한 친구는 말했습니다. “자신이 그들의 절망을 일으켜줄 수 있다는 교조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야 해요. 절망과 분노에 휩싸인 개인을 도와 의존하게 만들기 보다 더 큰 차원에서 바라봐야 하고요.” 역시.. 시스템 1(직관, 감성, 신념, 믿음체계)에 의존하는 저를 0점으로 만들어주는 친구입니다.

​​

진짜 개인주의를 경험해야 합니다

​개인의 분노는 세대와 이념, 남녀 간 증오와 혐오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분노하는 사람은 분노를 표출할 대상을 찾기 위해 늘 두리번거리며 분노의 의미를 그럴싸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저 또한 고등학교 때 교복 재킷에 보풀이 심하게 생긴 이유를 들며, 입학 때 학교에서 해당 교복업체를 지정업체로 선정해서 공문을 보낸 것을 문제시 삼아 여론을 형성하며 이슈화시켰고, 이미 민주화운동이 훨씬 지난 시점이라 의롭게 분노할 거리가 없었던 대학시절에는 평소 맛있게 잘 먹고 있었던 학식의 부실함을, 타 학교에 비해 아주 값싼 등록금이었지만 등록금이 오르는 것을 풍자하는 카툰을 그려 학생회 교지에 실기도 했습니다.

​당시 제게는 세상이 공정하고 희망적이면 안 되었습니다. 한쪽 집단에 속해서 투쟁하며 승리의 우월감을 맛봐야 하니까요. (사회 부조리에 행동하는 이들의 정당하고 의로운 분노까지 포함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어릴 적부터 욕구불만이 많았던 제가 힘 있는 대상을 정해 분노를 표출했던 이야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소중한 시간은 분노할 대상을 찾아 헤매기엔 너무 아깝습니다. 저 또한 젊음이 다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생명이 나에게 온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표현해 주고 아껴주고 싶은 마음을 그려넣고, 내 삶을 알아가는 행복으로 채색하는 하루의 크기가 너무 작아서 아쉽습니다. ​​​

 

빛나는 개인이 연결된  공존 네트워크​​

​내 맘대로 안되는 세상, 무기력하게 절망하지 말고 ‘진짜 나’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면 어떨까요. 우리에게는 ‘진짜 나’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SNS라는 완벽한 시스템이 있습니다. 화려한 일상을 자랑하는 잘난 이들도 각자 자기라는 분리된 감각에서 타인의 “좋아요”를 받고 힘을 얻는 공허한 개인일 뿐입니다. 타인의 삶은 그저 홀로그램 같습니다.

​우리가 겪는 절망과 외로움은 개인이 진정한 개인이 되지 못한 데서 오는 결핍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결핍으로는 진정한 소통을 할 수 없습니다. 결핍을 기반으로 한 소통은 서로의 부족함을 감각적으로 채워주는 조화로운 소통이 아닌 뺏고 빼앗기는 에너지 쟁탈전이니까요. 이제 우리는 빼앗기는 것이 두려운 닫힌 개인주의가 아닌, 스스로 영위할 수 있는 열린 개인주의를 경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알아가며 즐거움을 느끼는 것처럼, 이제 나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을 즐겨봤으면 합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잘하는지, 그리고 내게 가장 빛나는 것이 무엇인지요. 그리고 그 빛나는 무엇으로 나를 스타로 만들어 봅니다. 단 한 명의 소중한 이에게 스타가 되기 위해 노력해도 삶은 빛이 나기 시작합니다. 그 단 한 명도 없다면 나를 의식하며 멋져 보이려고 노력해도 충만함이 채워지더라고요. ​​

그렇게 저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나 자신을 위해, 사회 공존 네트워크를 움직이는 동력이 되는 창업자이자 스타가 되기 위해 온전한 하루를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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