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과 관점이동 차이

 

 

어느 분의 마음이 더 공감이 되시나요?

지난 주말 고속버스 수동 검표(주말 승객들이 몰리는 시간대 임시버스로 배차된 관광버스에서 수동 검표 진행)를 담당하는 아저씨가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 짜증과 거친 화를 받아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습니다. 아주 간혹 고속버스를 이용하는 제가 본 장면만 2번째이니 하루 동안 그러한 일이 얼마나 많이 반복될까요. 화를 받아내고 있는 분은 유난히 굼떴고, 상황 대처가 느렸습니다. 한 번은 총 20명 승객 중 19명만 검표되어 1명을 찾느라 늦게 출발했고, 한 번은 출발시간 1분 남겨놓고도 탑승을 기다리는 승객 줄이 길게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어디선가 화난 얼굴의 아저씨가 나타나 일을 해결해 줬는데 그 해결사 아저씨는 화를 주체할 수 없는지 승객들까지 얼어붙게 했습니다. 

여기서 어느 분의 마음이 더 공감되시나요? 만약 회사에서 답답하고 느려터지고 늘 실수 연발을 하는 사람이 벌인 일까지 맡아서 해결하는 데, 상대는 개선되지 않고, 상대의 뒤처리까지 담당하면서 똑같은 보수를 받고 있다면… 그런 경험을 한 이들에겐 화를 내는 이에게 공감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존중받지 못한 경험이 있었다면 반항도 못하는 약한 모습으로 화를 받아내는 이에게 깊은 공감을 할 것 같고요.

 

 

경험을 바탕으로 세팅된 공감력

전 솔직히 화를 받아내는 분이 너무 짠했습니다. 그만 좀 하시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습니다. 저는 사회적 약자에게 심하게 공감합니다. 그래서 학창 시절 왕따를 당하는 친구들을 보호했고, 학교폭력 예방협회에 가입해서 열심히 활동했고, 나름 취약계층을 위한 봉사활동도 많이 했습니다. 제 공감의 가장 많은 부분의 경험을 제공한 이는 엄마였는데, 어린 시절 놀고 있으면 저를 쓸쓸히 바라보는 엄마를 느꼈습니다. 저는 그 쓸쓸한 눈빛이 너무 두려웠습니다. 엄마가 떠나갈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온 힘을 다해 엄마를 지키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저에게 엄마는 지켜줘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경험하지 못한 영역을 공감하고 싶다면?

그런데 누군가에게 약자가 되어본 적 없는, 오히려 질투를 살 만큼 빛이 나는 사람이 아프고, 고통을 느낀다면… 상대가 느끼는 고통을 그대로 공감하고는 싶은데 공감이 잘 안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항상 빠른 솔루션을 제공하는 것이 최선이라 믿고 행동하는 저는 답을 찾고자 또 뇌를 분주히 움직입니다. 

경험 Base ‘공감’에서 노력 Base ‘관점 이동’

그래서 관점을 이동해 봅니다. 내가 상대가 되어 상황을 시뮬레이션 하고 무수한 경험을 하고 나면 느껴집니다. “그랬구나, 나 같아도 그럴 것 같다.” 그렇게 이해하게 됩니다. ‘관점 이동’은 사실상 대단한 노력과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관점 이동의 노력을 하지 않겠죠.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제게 이익을 주더라도 굳이 공감하려 하지 않고, 제 삶에 영향력을 미치지 않도록 가볍게 무시해버리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해되지 않는 말을 해버리면 속으로 노랠 부릅니다. “널 사랑하지 않아~♪” 

 

사랑’으로 승화되는 우리의 삶

우주가 인간에게 내린 가장 큰 선물이라는 거울뉴런이 성인이 되어 닫혀버렸어도, 인간의 뇌는 사랑으로 계속 진화되도록 설계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이들은 뇌가 무럭무럭 성장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공감, 서로를 잇는 최고의 기술

최근 유튜브를 보면 ‘공감’키워드가 참 많이 보이네요. 함께 공존해야만 하는 세상, 하지만 각자도생으로 분리된 세상에서 서로를 잇는 가장 중요한 기술이 ‘공감’일 것입니다. 뇌과학적으로 풀이하면 공감의 기능은 거울뉴런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이가 아프면 나도 아프다.” , “힘든 사람을 보면 그 처지가 이해되고 도와주고 싶다.”, ” 공포영화에서 쫓기는 사람을 보면 마치 내가 도망가고 있는 듯 느껴진다.”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끼는 ‘공감”이야말로 우주가 인간에게 내린 가장 큰 선물이자 미러 뉴런의 신비한 기능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감을 담당하는 거울뉴런은 상대의 경험을 공유하며 학습능력을 최고조로 올리던 어린 시절에 활성화되다가 성인이 되면서 퇴화된다고 하는데요, 특히 어떤 높은 자리, 혹은 명령을 내리는 자리에 올라서면 더욱더 제한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지금 어른이 된 우리의 공감 능력은 어린 시절 경험에 의해 이미 세팅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어느 분의 마음이 더 공감이 되시나요?

지난 주말 고속버스 수동 검표(주말 승객들이 몰리는 시간대 임시버스로 배차된 관광버스에서 수동 검표 진행)를 담당하는 아저씨가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 짜증과 거친 화를 받아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습니다. 아주 간혹 고속버스를 이용하는 제가 본 장면만 2번째이니 하루 동안 그러한 일이 얼마나 많이 반복될까요. 화를 받아내고 있는 분은 유난히 굼떴고, 상황 대처가 느렸습니다. 한 번은 총 20명 승객 중 19명만 검표되어 1명을 찾느라 늦게 출발했고, 한 번은 출발시간 1분 남겨놓고도 탑승을 기다리는 승객 줄이 길게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어디선가 화난 얼굴의 아저씨가 나타나 일을 해결해 줬는데 그 해결사 아저씨는 화를 주체할 수 없는지 승객들까지 얼어붙게 했습니다. 

여기서 어느 분의 마음이 더 공감되시나요? 만약 회사에서 답답하고 느려터지고 늘 실수 연발을 하는 사람이 벌인 일까지 맡아서 해결하는 데, 상대는 개선되지 않고, 상대의 뒤처리까지 담당하면서 똑같은 보수를 받고 있다면… 그런 경험을 한 이들에겐 화를 내는 이에게 공감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존중받지 못한 경험이 있었다면 반항도 못하는 약한 모습으로 화를 받아내는 이에게 깊은 공감을 할 것 같고요.

 

 

경험을 바탕으로 세팅된 공감력

전 솔직히 화를 받아내는 분이 너무 짠했습니다. 그만 좀 하시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습니다. 저는 사회적 약자에게 심하게 공감합니다. 그래서 학창 시절 왕따를 당하는 친구들을 보호했고, 학교폭력 예방협회에 가입해서 열심히 활동했고, 나름 취약계층을 위한 봉사활동도 많이 했습니다. 제 공감의 가장 많은 부분의 경험을 제공한 이는 엄마였는데, 어린 시절 놀고 있으면 저를 쓸쓸히 바라보는 엄마를 느꼈습니다. 저는 그 쓸쓸한 눈빛이 너무 두려웠습니다. 엄마가 떠나갈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온 힘을 다해 엄마를 지키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저에게 엄마는 지켜줘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경험하지 못한 영역을 공감하고 싶다면?

그런데 누군가에게 약자가 되어본 적 없는, 오히려 질투를 살 만큼 빛이 나는 사람이 아프고, 고통을 느낀다면… 상대가 느끼는 고통을 그대로 공감하고는 싶은데 공감이 잘 안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항상 빠른 솔루션을 제공하는 것이 최선이라 믿고 행동하는 저는 답을 찾고자 또 뇌를 분주히 움직입니다. 

경험 Base ‘공감’에서 노력 Base ‘관점 이동’

그래서 관점을 이동해 봅니다. 내가 상대가 되어 상황을 시뮬레이션 하고 무수한 경험을 하고 나면 느껴집니다. “그랬구나, 나 같아도 그럴 것 같다.” 그렇게 이해하게 됩니다. ‘관점 이동’은 사실상 대단한 노력과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관점 이동의 노력을 하지 않겠죠.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제게 이익을 주더라도 굳이 공감하려 하지 않고, 제 삶에 영향력을 미치지 않도록 가볍게 무시해버리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해되지 않는 말을 해버리면 속으로 노랠 부릅니다. “널 사랑하지 않아~♪” 

 

사랑’으로 승화되는 우리의 삶

우주가 인간에게 내린 가장 큰 선물이라는 거울뉴런이 성인이 되어 닫혀버렸어도, 인간의 뇌는 사랑으로 계속 진화되도록 설계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이들은 뇌가 무럭무럭 성장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코멘트

“공감과 관점이동 차이” 에 하나의 답글

  1. 정독해서 읽었습니다.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글이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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