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노마드의 삶

나는 자주 산티아고를 꿈꿨다

회사를 다닐 때는 ‘한 달의 자유시간’을 늘 욕망했다. 생각해 보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당시는 한 달의 자유시간이 주어진다면 산티아고 순례길 800km를 완주하고 싶었다. 지평선을 보고 걷다가 만난 작은 시골마을에서 진한 커피 한 잔과 현지 음식을 먹고 다시 걷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가슴이 뛴다. 꼭 산티아고의 한 달이 아니더라도 몇 박 며칠 티베트고원이나 그랜드캐니언을 걸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어떤 장소에 가보고 싶은 게 아니라 하루 종일 지평선을 바라보고 걷고 싶은 것이다. 유라시아까지 발자취를 남긴 한민족의 유목민 DNA가 찐으로 작동하나 보다.

그러나 막상 퇴사를 하고 한 달의 자유를 누릴 수 있음에도 산티아고는커녕 제주 둘레길도 시도하지 않았다. 창업 준비로 내 버킷리스트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당장의 창업 준비가 내게 더 매력적인 선택이었다.

지난 시간 워커홀릭으로 살면서 내 인간관계의 대부분은 ‘일로 연결된 관계’ 또는 ‘내가 보살피고 책임져야 하는 관계’였다. 물론 그들과도 따뜻한 감성을 누릴 기회는 충분했지만 난 책임과 역할로 사람을 대했던 것 같다. 그래서 업무를 지시받고, 공유하고, 소화하고, 설득하는 대화이거나 상대의 니즈를 해결해 줘야 하는 대화가 많았다. 그리고 항상 꿈꿨다. 삶을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바람대로 딥하고 와이드하고 고차원의 주제까지 넘나들며 대화가 꽤 통하는 친구가 생겼지만, 우린 어느 순간부터 ‘일’얘기를 하면서도 소통의 기쁨을 느낀다. 그리고 대화의 끝은 NEXT 액션을 도출한다. 꽤 생산적이고 명쾌하다.

삶의 주도권을 획득하니 ‘바람’이 사라졌다

산티아고 순례길, 깊은 대화, 한 달의 자유… 사실 그것들을 꿈꿨던 당시는 시간의 주도권과 관계의 자연스러움이 내게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원했나 보다.

3월이 시작되고 시간에 무척 쫓겼다. ‘한 달의 자유’를 꿈꿨던 이전 시간보다도 더 여유가 없었다. ‘하루의 여유’라도 있었으면 좋을 만큼 말이다. 지난해 퇴사를 하고 예비창업 패키지로 사업 자금을 만들어 보겠다며 여러 달을 집중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하면 정부 지원금을 딸 수 있을까”에 뇌의 총량을 몰빵했고, 정부 지원금이 없이는 자립할 수 없는 창업자로 의존성이 커져갔다. 2023 예비창업패키지 서류전형을 통과할 수 있는 두개의 공모사업과 가산점이 부여되는 3개의 공모전 실패와 코로나의 무력감에 바닥을 치고는 정신이 차려졌고, 다시 창업의 본질로 돌아가 원점에서 한걸음씩 작은 커리어와 가능성을 만들며 3월을 맞이했다.

그리고 지난달 말 예비창업 패키지 사업공고가 떴다. 외면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기회가 될 수 있으니 사업계획서를 다시 준비했다. 솔직히 금방 할 수 있는 15페이지의 계획서를 작성하는데 많이 힘들었다. 휴식을 취해도, 잠을 자도, 더 글로리 시즌 2를 보면서도 계속 나를 쪼아대던 사업계획서를 오늘에야 제출을 하고 비로소 해방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 맞이하는 소소한 일상이 산티아고 순례길이 필요 없을 만큼 행복하다. 물론 지금도 간혹 에너지가 떨어지면 과거의 바람들이 갑툭튀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나의 감정들이 얼마나 과장된 연기를 하고 있는지 알기에 웃어넘긴다. 그저 에너지 충전이 필요할 뿐인데 그것을 채우기 위해 무리수를 둘 필요는 없다.

과제에서 해방된 오늘의 ‘헬스-카페독서’는 참 행복하다. 행복은 특별한 무엇을 해야 얻는 게 아니라, 성실한 삶의 사이사이에 존재하나 보다. 예창패 사업계획서에 쫓기던 3월도, 주 3일 출근하는 언론사 업무도, 새롭게 일로 만난 관계들에서 오는 피로함도, 사업 아이템 시장 검증을 위한 여러 시도들도, 나를 정신없이 몰아가지만 불만은 없다.

모든 것이 내가 선택한 것이고, 내 삶의 주도권이 내게 있음을 깨닫게 된 후로 난 버킷리스트가 필요 없어졌다. 예전 퇴사 이전 친구가 내게 해준 말이다. 나 자신의 가치를 ‘쓰임’으로 정했던 터라 업무에서도 관계에서도 No를 하지 못하고 힘겨움을 짊어지고 있었다. 그게 조직에도, 상대를 위해서도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때 친구의 말이 나를 옥죄던 강박을 느슨하게 하는 큰 힘이 되었다. 지금은 관계에서 일에서 힘든 일을 겪고 있는 후배들에게 써먹는 말이다.

그 누구도 당신의 선택을 막을 권리가 없어요.
상대방의 말에 조급하게 반응하기보다는 그냥 자신을 이야기하세요.
그리고 상대방이 어떤 말을 하더라도 10초 기다리며 답을 하며 여유를 가져보세요.

빛나는 콘텐츠 Brand Director

 

 

비로소 ‘삶’과 ‘일’이 하나가 되었다

생각해 보면 스스로 선택한 일을 할 때는 꽤 즐거웠다. 그러나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의미가 사라지고부터 일과 삶이 분리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일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다만 내 삶의 주도권을 포기했으면 치뤄야 하는 다른 이의 개입은 받아들이기 싫었던 것이다. 당시는 회사와 누군가의 리더십을 문제삼기도 했지만, 뒤늦게 생각하니 스스로 삶을 방치했던 나를 먼저 점검했어야 했다.

난 지금 내 삶을 주도하고 있다. 종일 일하면 보상심리가 발동하던 예전과 달리 일과 쉼, 대화와 회의가 분리되지 않는다. 그래서 난 단언컨대 행복하다 말할 수 있다. 그렇게 하루하루 노력의 총량을 모아 사회에 좋은 영향력을 주는 진정성을 키우고 싶다.

 

덕업일치의 삶
일상에서 내가 하는 일 자체를 혁신하라.
내 삶을 정진하면서 자연스럽게 얻게 되는 생활 근육이 성장이다.
성장은 목표가 아니라 과정에서 훈장처럼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고민과 성실함으로 완성된 어벤져스들이 모여 새로운 사회를 만든다.

“그냥 하지 말라”저자 송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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